유럽 의회는 총회에서 주택담보 금융에 '면책 채무(Non-recourse debt)' 조항을 적용하도록 집행위원회와 회원국들에게 요청하기로 의결하여, 앞으로 회원국들의 주택 정책에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앞서 유럽 의회는 은행의 저당권 행사로 발생하는 강제 퇴거를 줄이는 대안을 찬성 343, 반대 151, 기권 189표로 통과시켰는데, 채무 재조정 또는 면책 채무의 허용, 사회 보장 주택의 확충, 회원국 주택 담당 장관의 연례회의 등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면책 채무'만을 별도로 택하여 진행된 표결에서 찬성 318, 반대 269, 기권 52표로 의회를 통과한 이 조항은 스페인에서는 주택담보 금융을 둘러싸고 오랫동안 시민 단체와 정부가 충돌한 쟁점으로서, 유럽 의회는 시민 단체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주택담보 금융에서 '면책 채무'는 주택구입자가 담보 할부금을 납부하지 못해 은행이 저당권을 행사하여 강제 퇴거 되는 경우 저당권 계약 자체가 취소되어 채무가 면제되는 조항이다.

미국과 일부 유럽 국가에서 실행하는 이 제도는 담보된 주택이 소유자의 거주 용도로 실제로 쓰이는 경우에만 적용되는데 영미 문화권에서는 소비자 권리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고 한다.

스페인에서는 지난 수년간 계속된 경제 위기로 실업자가 증가하자 담보 할부금을 제대로 납부하지 못하여 살던 집에서 강제 퇴거 당하는 가정이 늘었는데, '면책 채무' 조항의 미비로 퇴거 후에도 채무 변제 의무가 계속 남아서 신용불량자로 분류되어 정상적인 경제 활동에 많은 지장을 받게 된다.

유럽의회보다 먼저 유럽 사법재판소는 스페인의 담보 금융 제도에 관한 법규가 소비자 보호에 미흡한 점에 우려를 표시하면서 은행이 저당권 행사를 남용할 만한 계약서 조항이 있으면 법원이 강제 퇴거 명령을 중단하도록 스페인 사법부에 주문한 바 있다.

PAH(Plataforma de Afectados por la Hipoteca)는 주택 할부금 미납으로 강제 퇴거된 사람들이 결성한 단체로서, 강제 퇴거의 중지와 사회보장 주택의 대폭적인 확충을 주장하는 한편 면책 채무 조항을 주택담보 금융에 보편적으로 도입하고 소급 적용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정부 측의 냉담한 답변이 되풀이되자 행동에 나서게 된다.

이들은 약 1백 5십만에 달하는 유권자의 연대 서명을 첨부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반영한 법안을 직접 국회에 발의하고, 각 정당에서 법안 지지의 약속을 받는데 성공하였으나, 집권당인 국민당(Partido Popular, PP)의 의도적인 묵살에 직면한다.

스페인 법률에 의하면 유권자 5십만 이상의 연대 서명이 있으면 시민이 직접 법안을 발의할 수 있으며, 법안 발의에 소요된 비용은 국가가 보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강제 퇴거는 계속되고, 이를 비관하여 자살을 택하는 사람이 늘어나 큰 사회 문제로 부각되자, 정부는 강제 퇴거의 집행을 당분간 정지하고 새로운 법안을 마련하겠다고 스페인 정부는 약속한바 있다.
 

▲ escrache를 외치는 스페인 PHA 회원들

또한, 스페인정부가 준비하는 법안이 PAH 법안의 핵심인 면책 채무 조항을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적용하는 유명무실한 것으로 드러나자, PAH는 국민당 고위 당직자들의 집 앞에서 'escrache'라는 생소한 말로 불리는 스페인 PHA회원들은 집단 항의 시위를 평화적으로 벌여 왔다.

반대로 국민당은 사생활 침해와 신변 위협을 이유로 이들 시위자를 고발하고, '테러리스트' 심지어 '나치' 등의 막말로 비난하면서 이들을 범죄 집단처럼 취급하여 스페인 사회는 또 다른 차원의 논쟁에 휩싸이게 된다.

'escrache'는 아르헨티나에서 생겨난 말로, 1995년 메넴 대통령이 1970-80년대 군부정권 독재자들의 사면을 결정하자 독재 정권에 의해 희생된 사망, 실종자의 가족들이 가해자의 집 앞에서 집단으로 항의 시위를 하였는데, 이 행위를 언론에서 'escrache'로 부르기 시작했고 시위가 뜸해지면서 그동안 잊혀 졌으나, 2013년 스페인에서 다른 이유로 부활하여 자주 사용하는 말이 됐다고 전해진다.

스페인 법원은 국민당이 고발한 PAH의 'escrache' 행위를 무혐의로 기각하기로 결정하였는데, 법원은 그 이유로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진 유명 인사를 추적 취재하는 '파파로치' 행위와 'escrache'는 행위의 대상이 되는 공인의 사생활이 노출되고 불편을 주는 공통점이 있지만, 파파로치가 민주주의의 근간인 '알 권리' 를 위해서 용인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escrache' 는 의사 표현과 시위의 자유를 위해서 용인된다고 밝혔다.

스페인 사법부 통계에 의하면, 2012년, 1년 동안 담보 할부금 미지급으로 인하여 43,858건의 강제 퇴거 명령이 법원에 의해 집행되었는데, 여기에는 상가 등 다른 용도의 부동산이나 상주하지 않는 주택도 포함되어 있지만 상주하는 주택이 대부분인 것으로 알려졌다.

스페인 집권 정당인 국민당이 발의한 강제 퇴거에 관한 개정 법안은, 원내의 다른 정당들은 모두 거부하여 국민당 단독 표결로 하원을 통과했으며, 상원 통과를 눈앞에 두고 있는데, 이번의 유럽 의회 결의안으로 정치적인 타격은 물론 법안의 대폭적인 수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한편 유럽 의회는 PAH가 소비자 권리 옹호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하여 '2013년의 유럽 시민' 으로 선정하여 시상하기로 결정했다. 
 

스페인 김정현 기자  통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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