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뉴스는 지난 교수신문에 기획연재되었던 목포대학 도서문화연구원의 '섬 이야기'를 통해 섬들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 담겨진 흔적을 돌아보는 취지로 이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 도2. 털벌립과 정동벌립을 쓴 농부(1914년 5월25일, 대정읍 상모리와 하모리ㆍ촬영 토리이 류우조오(鳥居龍藏)).

한평생 제주학(濟州學)에 몰두한 김영돈(金榮墩) 선생은 생전에 제주도 여인들의 민요를 옹골차게 수집한다. 그 중 위미리(남원읍)에서는 다음과 같은 민요를 한 편 수집한다.

‘정동벌립’에 대갓끈 달아/나볏이 청부채 들어/‘허울허울’ 저 올레로 오니/서울 선비 오는듯하다

▲ 도1. 정동벌립(제주대학교부속박물관 소장ㆍ단위는 cm). 제주도에서 정동벌립의 주생산지는 귀덕리(한림읍)다. 전통적으로 남자들이 만든다. 이 정동벌립의 모자는 410개의 씨줄과 158개의 날줄로 결었다.

삿갓은 제주도 전통모자 아니
‘정동벌립’은 ‘정동(댕댕이덩굴)’로 엮어 만든 제주도의 전통 모자다(도1). ‘허울허울’은 활개 저으며 걷는 모양이다. 제주도 사람이 정동벌립을 쓰고 부채를 들고 저 올레로 오는 모습이 마치 서울 선비가 오는듯하다는 것이다. 제주도 남자들은 ‘서울 선비’들처럼 갓을 쓰지 않았다. 제주도 남자들이 서울 선비처럼 갓을 즐겨 썼더라면 이런 노랫말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주도에는 전통적으로 3가지의 모자가 전승한다. 그것은 털벌립ㆍ정동벌립ㆍ대패랭이다. 삿갓은 제주도의 전통 모자는 아니다. 조선왕조 성종(成宗) 8년(1477) 2월1일, 제주도 사람 김비의(金非衣) 일행은 진상품을 배에 가득 싣고 한반도로 가다가 추자도(楸子島) 근처에서 모진 풍파를 만나 표류하다가 오키나와[沖繩]에 표착한다. 그 당시의 표류기에 삿갓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나뭇잎으로 삿갓을 만들어 쓰는데 우리나라 스님들의 모자와 같다(㮨葉作笠 狀如我國僧笠)”는 것이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이렇게 만든 삿갓 모양의 모자를 ‘쿠바가사(クバ笠)’라고 한다. 쿠바가사는 그 당시 우리나라 스님들의 삿갓과 모양이 비슷했던 것같다. 제주도의 일반 백성들은 그 당시에도 털벌립ㆍ정동벌립ㆍ대패랭이를 썼을 것이다.

제주도에서 1996년에 발간한 '도승격 50주년 기념 사진집, 제주100년' 에 제주도의 전통 모자가 보인다. 1914년 5월25일, 일본인 문화인류학자 토리이 류우조오(鳥居龍藏)가 지금의 상모리와 하모리(대정읍)에서 찍은 사진이다(도2). 토리이씨는 '민족학상으로 본 제주도(民族學上より見たる濟州島)' 라는 글에서 털벌립과 정동벌립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제주도 사람들은 말[馬]의 털로 만든 모자를 쓴다. 이것은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풍습이다. 또 풀[草]로 만든 모자도 쓴다. 이 또한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풍습이다.

▲ 도3. 대패랭이를 쓴 제주도 여인(1891년?, 제주도)[국립중앙박물관, 한국사진박물관(1998),『유리원판으로 보는 풍물 1891∼1930』에서].

새로 들인 며느리에 대패랭이 선물
‘말의 털’로 만들었다는 모자는 털벌립이다. ‘풀’로 만들었다는 모자는 정동벌립이다. 털벌립과 정동벌립은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모자라는 것이다.

털벌립은 쇠털로 만든 모자다. 말의 털로 만들었다는 것은 오기(誤記)다. 털벌립을 만드는 대강의 과정이다. 쇠털을 깨끗이 빨아 말려서 활줄을 튕겨 퍼지게 한다. 콩풀을 먹여서 일정한 틀에서 모양을 갖춰나간다.

정동벌립은 다음과 같이 만든다. 가을에 댕댕이덩굴을 채취한다. 담을 올라가거나 나무에 감겨 있는 것은 구불거리니까 땅바닥에 곧게 뻗은 것을 사용한다. 이슬을 맞혀가며 햇볕에 25일 이상 말려둔다. 물을 축여 부드럽게 해서 엮는다. 정상부를 ‘절벤’, 둥근기둥을 ‘망’, 차양을 ‘천’이라고 한다. 이를 만드는 기능은 제주도 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대패랭이는 제주도 여성들이 주로 햇빛 가리개로 쓴다(도3). 이를 만드는 기능은 수산리(성산읍)와 난산리(성산읍)에 전승한다. 이곳의 남정네들은 농한기 때 부업으로 대패랭이를 만들어 생계를 돕는다. 대패랭이의 재료는 신우대의 대오리다. 제주도의 시부모들은 새로 맞아들인 며느리에게 대패랭이를 선물하곤 한다. 제주도의 아낙네들은 한 평생 ‘잡초와의 전쟁’을 한다. 대패랭이를 쓰고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 이 거친 땅에서 살아가라는 무언(無言)의 가르침인지도 모른다.

도2의 사진 속에서는 두 남자가 지게를 지고 밭으로 간다. 앞서가는 젊은 남정네는 털벌립을 쓰고있고, 뒷 따라가는 늙은 남정네는 정동벌립을 쓰고있다. 도3 사진 속의 아낙네는 머리에 대패랭이를 쓰고 있다.

정동벌립과 털벌립은 방한(防寒)·방수(防水)·차양(遮陽)의 기능을 갖춘다. 제주도의 남정네들이 눈 오는 날, 비오는 날, 무더운 날 바깥에서 잡다한 일을 할 때 털벌립이나 정동벌립을 쓴다. 대패랭이는 차양용의 모자다. 제주도의 아낙네들이 햇볕이 내려쬐는 날 밭에서 잡초를 뽑을 때 대패랭이를 쓴다.

털벌립ㆍ정동벌립ㆍ대패랭이는 모두 편편한 모자의 차양 위로 둥근기둥이 우뚝 솟은 모양으로 재료만 다르다. 제주도 사람들은 일을 할 때나 외출할 때 이 모자를 쓴다. 남정네들은 털벌립이나 정동벌립을 선호하고, 아낙네들은 대패랭이를 선호한다.

▲ 도4. 신윤복(申潤福, 1758∼?)의 풍속도(일부). 간송미술관 소장(국보 135호).

기능ㆍ실용 위주의 전통모자
제주도의 민요 속에 나타난 ‘서울 선비’의 모자는 어떤 모습일까. 조선후기 풍속화가 신윤복(申潤福, 1758∼?)의 풍속도에 나타난 선비의 갓을 들여다보자(도4).

장가를 든 남자는 머리털을 끌어 올려 정수리 위에 틀어 감는다. 이를 ‘상투 튼다’고 한다. 상투를 틀고 나서 그것이 다시 풀어지지 않게 동곳으로 꼽는다. 동곳은 금ㆍ은ㆍ옥ㆍ산호ㆍ나무 따위로 만든다. 동곳의 대가리는 반구형이고 끝은 뾰족해 굽은 것과 굽지 않은 것, 또는 말뚝 같이 생긴 것 따위가 전승한다.

상투를 튼 사람이 머리카락을 걷어 올려 흘러내리지 않게 그물처럼 생긴 띠를 두르고 묶는다. 이를 망건(網巾)이라고 한다. 망건 위에 탕건(宕巾)을 쓴다. 탕건은 선비들이 갓 아래 받쳐 쓰는 관(冠)의 하나다. 말총을 잘게 세워서 앞쪽은 낮고 뒤쪽은 높게 턱이 지도록 한다. 외출할 때는 그 위에 갓을 쓴다.

갓은 양태(凉太)와 총모자로 나뉜다. 양태는 갓의 차양으로 대오리로 엮어 만든다. 총모자는 말총으로 만든다. 제주도 여인들이 만든 양태와 총모자는 통영(경상남도)으로 간다. 통영의 장인(匠人)들은 제주도 여인들이 만든 양태와 총모자로 통영갓을 만든다. 양태와 총모자를 붙이고 갓싸개(갓의 겉에 바르는 몹시 얇고 살핏한 베)를 바르고 먹칠과 옻칠을 해 통영갓을 완성시킨다. 통영갓은 서울은 물론 한반도의 선비들을 위한 것으로 제주도의 남성들을 위한 것은 아니다. 망건ㆍ탕건ㆍ양태ㆍ총모자를 만드는 기능은 제주도 여성들의 생계를 꾸리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할 뿐이다. 1925년 당시에도 제주도 내에서 양태와 총모자 겯기에 종사하던 호수는 1만3700호에 이른다. '제주도편람' 에 따르면, 1930년 한 해에 양태 17만5600개, 총모자 8만3770개를 생산했다고 한다.

갓일은 어찌해 제주도에 번지게 됐을까? 제주도는 예로부터 말[馬]와 신우대가 많은 고장이다. 망건ㆍ탕건ㆍ총모자ㆍ양태를 만들 재료 확보하기가 손쉬운 곳이기 때문이다. 갑오개혁(甲午改革, 1896년) 때 단발령의 고비를 겪으면서 갓일은 점차 사양길에 접어들고, 1960년대 말에 이르면서 자취를 감춘다.

제주도의 전통적인 모자 털벌립ㆍ정동벌립ㆍ대패랭이는 기능과 실용을 강조한 남녀 모두의 공유물(共有物)이고, 한반도의 전통적인 모자 갓은 권위와 멋을 강조한 남성들만의 전유물(專有物)이다. 제주도는 권위와 멋을 강조한 모자를 쓰고 다니는 남자는 보기 드문 섬이었는지 모른다. <고광민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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