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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의 섬…섬사람들의 생활혁명을 이끌다섬이야기 25 비금도 천일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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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7.06  09: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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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뉴스는 지난 교수신문에 기획연재되었던 목포대학 도서문화연구원의 '섬 이야기'를 통해 섬들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 담겨진 흔적을 돌아보는 취지로 이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 비금도 ‘1호 염전’ 일대 풍경. 호남지역의 경우, 광복이후 염전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비금도가 그 출발지였다. 사진=신안군
전라남도 신안군 비금도는 목포로부터 54.5km 거리에 자리하고 있는 서남단의 섬이다. 목포에서 흑산도로 가는 쾌속선이 중간에 한번 경유하는 섬이며, 바둑천재 이세돌의 고향이기도 하다. 면적은 52㎢이고, 해안선의 길이는 133㎞에 이른다. 부속도서인 수치도를 포함해, 거주 인구는 약 4천명(2010년 말 기준)이다. 섬의 형세는 동서가 길고 남북이 짧은 모양인데, ‘새가 날아오른 형상’이라 해서 ‘비금도(飛禽島)’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비금도는 소금의 섬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 섬 가운데 염전이 가장 많은 곳이다. 광복이후 천일염 생산에 성공해 염전이 호황을 이루자, 한때 ‘돈이 날아 다닌다’는 뜻의 ‘비금도(飛金島)’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세계적으로 소금을 만드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우리나라는 바닷물을 가마에 넣고 끓여서 소금을 만드는 방식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흔히 이러한 전통방식을 ‘화염(火鹽)’ 혹은 ‘자염(煮鹽)’이라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섬 지역에서 화염이 많이 생산되고 있었다. 그러나 화염은 물을 끓이기 위해 많은 양의 땔감이 소요되고, 그 생산량이 많지 않은 단점이 있었다. 그러한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해 태양열을 이용하는 방식인 천일염전(天日鹽田)이 국내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1907년 인천 주안지역에 형성된 염전이 최초 사례로 기록돼 있다. 이후 일제강점기 염전개발은 조선총독부가 독점했는데, 주로 경기이북과 평안남도 광양만 일대에 집중됐다. 남쪽은 강수량이 많아 북쪽에 비해 생산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호남지역의 경우는 광복이후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신안군 비금도가 그 출발지였다. 1946년 손봉훈과 박삼만 등이 중심이 돼 수림리 옛 화염터에 처음으로 천일염전을 조성했다. 광복이후 염전개발권이 민간에까지 개방됐기 때문에 가능한 시도였다. 맨 처음 천일염전을 만든다는 소문이 났을 때 주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외딴 섬에서 천일염전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짓 한다”는 놀림도 많았다. 그러나 천일염전을 통해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개척하려는 노력은 섬 마을 최초의 염전을 보기 좋게 성공시켰다. 주민들은 이 염전을 호남지역 최초라는 의미로 ‘1호 염전’ 혹은 ‘시조염전’이라 부르게 됐다. 인근 지역 사람들이 비금도 ‘1호 염전’을 보고 염전 개발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후 손봉훈은 처음 개발에 참여했던 마을 청년들을 중심으로 ‘기술원조합’을 결성해, 다른 지역으로까지 천일염전 개발을 확대해 나갔다.

   
 
‘1호 염전’ 성공이후 비금도에서는 또 다른 역사가 탄생했다. 1948년 비금도 동부 지역 해안선을 연결하는 갯벌에 100ha가 넘는 대규모 염전을 조성한 것이다. 이 지역의 모든 주민들이 힘을 합쳐 손수 돌을 나르고 제방을 막아 이룩한 성과였다. 염전의 이름을 대동염전(大同鹽田, 등록문화재 제362호)이라 했다. ‘대동’이라는 이름에는 섬사람들이 염전에 걸었던 꿈과 미래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다.

비금도가 천일염전의 중심지로 발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몇 가지 독특한 인문환경이 존재한다. 현 신안군은 원래 전통적인 화염의 생산지였고, 비금도 역시 그 중심 섬 중의 하나였다. 때문에 주민들 중에는 소금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는 땔감나무의 부족으로 화염이 중단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한 상황에서 조선총독부가 평안남도 천일염전을 대규모로 확장하면서 부족한 인부를 전국에서 모집해 갔는데, 그 때 비금도 주민들의 상당수가 염전 일을 하러 떠났다. 생계 수단이 절실한 상황에서 소금 만드는 일 자체가 그리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복이후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천일염전 기술이 비금도에 전파됐고, 천일염의 고장으로 변모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 비금도에 성행했던 강달어 파시(波市)와 새우잡이 어업의 발달은 소금의 수요량을 증가시켜, 천일염 산업이 섬 지역에서 꽃피울 수 있는 또 다른 배경이 됐다.

이후 비금도는 천일염전 사회적 확산의 중심 공간이 됐다.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다양한 개발조합을 만들어서 천일염전을 개척해 나갔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에서는 1951년 무렵 비금도에 ‘제염기술원양성소’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정부는 부족한 소금생산량을 늘리고, 한국전쟁으로 발생한 피난민들을 남한 사회에 정착시키기 위해 대규모 천일염전을 전남의 도서 및 해안지역에 개발하는 정책을 수립했다. 그 과정에서 비금도가 천일염전 개발 기술을 보급하는 거점으로 활용됐다.

   
 
현재 신안군에는 광복이후 천일염전 개발과 관련된 각종 기록물들이 잘 보존돼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천일염 산업 발달과정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이러한 기록물을 통해 비금도 자체가 광복이후 한국 천일염전의 새로운 출발지였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서남해 도서지역이 천일염전의 중심지로 발달할 수 있었던 계기였다. 그것은 섬사람들의 생활에서 하나의 작은 혁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천일염전 개발에 성공하면서, 섬을 떠났던 많은 사람들이 섬으로 되돌아왔다. 섬을 지키며 살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이 마련됐기 때문이었다.

한때 정부의 폐염 정책으로 인해 천일염 산업은 사양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 2008년 천일염이 식품으로 공인되면서, 섬 지역의 천일염전은 다시 활기를 띄고 있다. 섬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경제적 기반 중 하나인 천일염전은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보여주고 있다. 한동안 섬마을에 남아 있는 염전은 우리나라 섬의 옛 모습을 상징하는 경관(land mark)으로 간주됐지만, 이제는 섬의 미래를 보여주는 ‘미래풍경(future scape)’으로 그 가치가 변모하고 있다.

   
▲ 최성환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최성환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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